아직 발굴이 되지 않은 폐사지에 서면 발 밑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개인적이라도 삽으로 파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도굴범으로 몰릴까봐
차마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하지만 어떤 귀중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 궁금증을 가시지 않습니다.
그런 궁금증을 가장 많이 남기고 온 곳이 서산 보원사지입니다. 보원사지는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길 오른쪽에 넓게 퍼져 있는데 제대로 된 안내판도 없어 그냥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작년에 보원사지를 찾았을 때는 한여름의 끝자락이었습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더운 여름날 그늘 하나 없는 풀섶을 헤치고 들어섰을 때 우뚝 솓아 있는 당간지주를 시작으로 보원사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두근거렸던 가슴의 울림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보물103호 보원사지 당간지주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합니다. 당간지주는 그 주변지역이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였고 돌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철·금동·나무로도 만든 것도 있습니다.
보원사지 당간지주는 높이 4.2 m 로 시원하게 뻗은 모양으로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습니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 져 있습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보물104호 보원사지
5층석탑
높이 900㎝. 기단은 2중기단으로 하층에는 사자상이, 상층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얕은 부조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상층기단 위에는 별석(別石)을 끼워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받치고 있으며, 초 층(初層) 탑신에는 우주(隅柱)와 문비가 모각되어 있고 2층 이상의 탑신은 체감이 완만합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만이 있고, 그 위에 철제로 된 찰간(刹竿)이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옥개석인데 넓고 끝이 반전되어 올라간 모양이 통일신라 탑의 양식이란
점입니다. 전체적으로 신라시대 일반 형 석탑양식을
계승한 통일신라 석탑양식을 보여주는 멋진
석탑입니다.
보물105호 법인국사보승탑
기울어져 보이는 이유는 삐뚤게 찍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똑바로
서있음)
높이 470㎝. 8각당형의 부도로 고려 광종대에 활약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부도입니다. 기단부가 좁고 높으며 하대석은 8각이며 안상(眼象) 안에 다양한 자세의 사자상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안상을 조금 설명하면 보통 탑이나 부도 기단부에 연꽃 모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신적이
있을 텐데 한문을 그대로 풀이하면 코끼리의 눈이란 뜻입니다. 왜 코끼리의 눈을 연꽃 모양처럼 새겼는가는 이 사진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코끼리는 부처님이 타고 온 동물이기에 신성한 동물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
기단에 코끼리를 새겨 탑이나 부도를 부처님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연등행렬 시 아기코끼리가 앞장 서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중대석의 받침은 원형으로 구름에 싸여 있는 용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석은 장식이 없는
8각기둥이며, 상대석에는 앙련(仰蓮)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탑신석은 중대석처럼 좁고 높으며, 사천왕상·문비(門扉)·인물상이 돌아가며 얕은 부조로
양각되어 있습니다.
보물 제106호. 법인 국사 보승탑비
보통 부도에는 부도를 세운 것을 기록한 비를 같이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보원사지도 부도를 세운 후 탑비를 세워 부도가 누구의 부도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전체 높이 4.25m, 비신 너비 1.2m. 재료는 화강암으로
비문은 해서체로 써있으며, 김승렴(金承廉)이 각자(刻字)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978년(경종 3)에 건립되었다는 걸 비문으로 알 수 있습니다.
보물102호 보원사지 석조
보원사지에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바로 보물 102호로 지정된 석조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시대의 왕들이 사용한 변기나 욕조등을 볼 수 있는데 아주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이 되 있어 놀란 적이 있는데 이처럼 무심한 석조가 있다니.
석조는 절에서 물을 저장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석조의 크기로 가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문화재입니다. 외곽 길이 3.5m, 너비 1.8m, 높이 0.9m의 보원사지 석조는 거대한 화강암을 통째로 안을 파내어 직사각현으로 만든 전형적인 통일신라 형식의 석조라 합니다. 밑바닥은 평평하며 바닥의 한쪽에 구멍을 뚫어 배수구를 만들었고 내외의 4면은 아무런 장식문양이 없는 평벽(平壁)입니다.
저는 석조를 처음 보았을 때 욕조를 연상했습니다. 다시 말해 석조가 그만큼 환상의 자유를 마음껏 뽐내고 있으며 무심히 파낸 공간은 세련되지도 정교하지도 않지만 넉넉함을 잃지 않고 모든 모서리에서 한국 고유의 선을 보여주며 생동감을 마음껏 뽐내고 있습니다.
<조선 탑파의 연구>의 저자이며 한국 미술사의 위대한 학자 중 한 분인 우현 고유섭은 한국미의 특색을 ‘무기교적 기교’ ‘무계획적 계획’ 이라고 말 한바 있습니다. 기교와 계획을 우선시 하지 않기에 정돈된 맛이 항상 부족하지만, 대신 질박한 맛과 순진한 맛이 뛰어나며 색체적으로 단조로움을 통해 적조미를 구성하고 비 균제성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한국의 미의 정의와 정확히 부합하는 문화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조선 백자를 보는듯한 느낌의 질박하고 소박하면서도 무심하면서도 자유로운 상상이 꿈틀대는 석조는 보원사지 유물 중 압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맨 끝에서 찍은 보원사지 전경 - 저 멀리 당간지주가 보인다.
보원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 되나 1968년 이곳에서 발견된 금동불입상이 6세기 배제 양식의 불상이어서 더 오래 전에 창건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백제 창건설은 이 지역이 중국의 남조 양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던 시기에 길목 역할을 한 곳이라는 점 때문에 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태안 반도를 거쳐 해미현으로 이르는 바닷길은 당시 중국과 교류하는 무역 항로였으며, 해미-운산-예산-부여로 이어지는 육로는 중요한 교통로였습니다.
더욱이 근처에 서산 마애 삼존불이 있기에 더욱 심증이 가지만 현재 남아있는 문화재가 전부 통일신라 이후의 유물들이고 고려 초기에는 탄문(坦文, 900-975) 스님의 탑비의 기록과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의 기록된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에 정확한 연대를 확인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올 해 봄부터 서산시와 문화재청이 발굴사업을 시작하므로 조만간 창건연대와 많은 비밀들이 밝혀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천년의 비밀을 간진한채 묻혀있는 유물들
신라말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였던 보원사. 2000여 명이 넘는 승려들의 독경소리가 골짜기에 가득했고 이들의 조석공양을 위한 쌀 씻은 물이 뿌옇게 흘러 내려갔을 정도로 융성했던 절. 크고 작은 가람(중이 살면서 불도를 닦는 집)이 많아 비가 와도 맞지 않고 각 전각을 다닐 수 있었다는 대가람. 하지만 11세기 이후 갑자기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 절.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 비밀을 가슴에 두고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깊고 깊은 잠에 취해 있다 해도 이제는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천 년의 침묵을 깨고 저 아름다운 석조의 물을 마시며 수행했던 많은 수행자들이 다시금 우리에게 옛 영화와 당시 생활상을 자세히 들려주길 손꼽아 기다립니다.
2006 . 3 .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