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교리---*

진묵대사

비로사 2007. 10. 27. 17:19





진묵 대사
일옥 (一玉) 스님 : 1562년(명종 17) - 1633년(인조 11년). 조선 중기의 고승(高僧).

호는 진묵(震默). 전라도 萬頃懸 佛居村 출신. 태어난 뒤 3년 동안 초목이 말라 시들었고, 비린내가 나는 음식과 마늘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지혜롭고 자비로워서 사람들이 "불거촌에 부처님 났다." 고 하였다. 7세에 출가하여 전주 봉서사(鳳棲寺)에서 불경을 읽었는데, 한 번 읽으면 곧 암송하고 내용을 통달하였으므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 또한 봉서사 주지는 어린 진묵에게 아침저녁으로 신중단(神衆檀)에 소향예배(燒香禮拜)하는 소임을 맡겼다.

그런데 어느 날 신중(神衆)들이 그 주지 승에게 현몽하여 이르기를 "우리 소신(小神)들이 어찌 감히 불(佛)의 예를 받겠는가 ! 원컨대, 다시는 아침저녁으로 소향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수많은 신이(神異)를 남겼지만, 그 생애는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의 고승 초의(草衣)가 지은 <진묵조사유적고 震默祖師遺蹟攷>에는

18가지 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사미 시절 창원의 마상포(馬上浦)를 지나갈 때 한 동녀(童女)가 사랑을 느꼈으나 따를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죽어서 남자가 된 뒤 다시 전주 대원사(大元寺)에서 만나 기춘(奇春)이라는 시동이 되었다. 대사가 그를 각별히 사랑하였는데 이것을 대중들이 비난하였다. 대사는 그것이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 : 일체의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떠난 삼매행)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 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바루를 펴게 한 뒤 기춘으로 하여금 바늘 한 개 씩을 각자의 바루 속에 넣어 주게 하니, 대사의 바루 속 바늘은 국수로 변하여 바루를 가득 채웠으나, 다른 승려들의 바루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이 있었다.

⸂ 늙은 어머니를 왜막촌(倭幕村)에서 봉양하고 있을 때, 여름 날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산신령을 불러 모기를 쫓게 한 뒤로는 이 촌락에 영영 모기가 없어졌으며 어머니가 죽자 제문을 지어 위령하였다.

⸃ 곡차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는 것이 계행(戒行)이었는데, 어느 날

한 중이 술을 거르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세 차례나 물었으나, 중이 대사를 시험하기 위하여 모두 술이라고 대답하였으므로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 중을 타살하였다.

⸄ 대사가 변산 월명암(月明庵)에 있을 때, 다른 승려들이 모두 출타한 뒤 홀로 <능엄경 弬嚴經>을 읽다가 수능엄삼매(首弬嚴三昧)에 들어, 문지방에 놓고 있던 손가락이 바람 때문에 열리고 닫히는 문에 부닥쳐 피가 난 것을 잊은 채 며칠 밤을 보냈다.

⸅ 월명암에 있을 때 불등(佛燈)이 매일 밤 일점 성광(星光)이 되어 멀리서 비치어 왔으므로 대사는 이것을 발견하고 목부암으로 옮겨가서 원등암(遠燈庵)이라 개칭하였다.

이곳은 원래 십육나한(十六羅漢)의 도량으로, 그들이 항상 대사를 시봉하는 마음에서 월명암으로 등광(燈光)을 비추었는데 그것은 대사의 뜻을 계발하기 위해서였다.

⸆ 전주 부에 있는 한 흠포자(欠逋者 : 官物을 축낸 죄인)가 도망을 가려고 대사에게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도망가는 것이 어찌 남자의 할 짓인가? 그러지 말고 나에게 공양을 올려라."고 하였다. 그를 돌려보낸 다음 대사는 주장자(狏杖子)를 가지고 나한당에 들어가 차례로 나한의 머리를 세 번씩 때리며 "관리 아무의 일을 잘 도와 주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밤에 나한이 그 관리의 꿈속에 나타나서, "네가 구하는 바가 있으면 직접 우리들에게 말할 것이지 어째서 대사에게 말하여 우리를 괴롭히느냐?

너의 소행을 보아서는 불고(不顧)하여도 가하나 대사의 명령이시니 좇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그를 구해 주었다.

⸇ 대사가 길을 가는데 소년들이 냇가에서 생선을 끓이고 있으므로 탄식하면서, " 이 무고한 고기들이 확탕(篳湯)의 고생을 하는구나?" 하니, 한 소년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스님도 먹고 싶지 않은가?" 하였다. "나도 잘 먹는다. " 하면서 그 고기를 몽땅 먹은 뒤 냇가에 가서 뒤를 보니 무수한 고기가 살아서 헤엄쳐 갔다.

⸈ 대사가 하루는 시자를 시켜 봉서사 남쪽 부곡(婦谷)으로 소금을 가져다주라 하니, 시자가 누구에게 주느냐고 반문하자 가보면 알 것이라고 하였다. 시자가 가서 보니 사냥꾼 여러 사람이 노루 고기를 회쳐놓고 소금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금을 받으며 "활인지불(活人之佛)이 골마다 있다 함은 이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

⸉ 합천 해인사에 화재가 나자 입으로 물을 뿜어 껐다.

⑩ 대사가 하루는 목욕, 삭발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문을 나가 시냇물을 따라가다가 지팡이를 세우고 서서 손가락으로 자기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자에게 이르기를, "이는 석가모니의 그림자니라." 하니, 시자가 "이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하였다.

대사가 이르기를, "너는 화상의 가(假)만 알 뿐 석가의 진(眞)은 모르는구나!" 라고 하였다. 봉서사에는 그를 기리는 부도와 조사전(祖師殿), 비가 건립되었다.


<참고 문헌> 震默祖師 遺蹟攷, 東師列傳.

...


인연법을 깨닫고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인연소기(因緣所起)'라고 하셨다.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이 합하여져서 생겨나고, 인과 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고 말씀하셨다.

또 부처님께서는 인연법을 달리 '의타기(依他起)라고 표현하셨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서로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것'을 무시하고 '나의 것'만을 추구해 보라.
'남'을 무시하고 '나'만 홀로 우뚝 서려고 해 보라.
나만 행복하면 남은 불행해져도 좋다는 생각으로 살아 보라.
'나'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고 높이 올라설 수도 없다.
오히려 남이 나를 받쳐주지 않기 때문에 항상 밑바닥에서
살 수밖에 없고 고독과 불행만을 되씹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인연의 주체는 바로 '나'라는 것을!
내가 '나'의 이익과 '나'의 사랑에 빠져 남을 무시하고
해치고 손해를 주면 악연을 만들게 되고, 내가 '나'와
남을 함께 생각하고 서로를 살리는 행동을 이루어내면 좋은 인연을 맺을 수가 있다.
'나'를 어떻게 다스리냐에 따라 다가오는 인연도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선연이냐? 악연이냐? 이것은 오직 '나' 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라. 눈길을 옮기고 귀를 기울이는
모든 것에서 우리는 수많은 인연들을 만나게 된다. 선연도 만나고 악연도 만난다.
하지만 그 많고 많은 인연들 중에는 절대적인 선연도 절대적인 악연도 없다.
절대적인 불행도 절대적인 행복도 없다.
왜냐하면 인(因)과 연(緣)이 잠시 합하여 모습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
석가모니불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던 조선시대 중기의
고승 진묵대사(1562-1633)는 많은 이적을 남기신 대도인이었다.
스님에게는 누이동생이 하나 있었고,
누이동생이 낳은 외동아들은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이 조카가 가난을 면하기 위해서는 복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스님은 7월 칠석날
조카 내외를 �아가 단단히 일러주었다.
"얘들아, 오늘밤 자정까지 일곱 개의 밥상을 차리도록 해라.
내 특별히 칠성님들을 모셔다가 복을 지을 수 있도록 해 주마."
진묵스님이 신통력을 지닌 대도인임을 아는 조카는
'삼촌이 잘 살게 해주리라' 확신하고 열심히 손님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마당에다 자리를 펴고 일곱 개의 밥상을 차렸다.
밤 12시 정각이 되자 진묵스님이 일곱 분의 손님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하나같이 거룩한 모습의 칠성님은 아니었다. 한 분은 째보요 한 분은 곰보,
또 다른 분은 절름발이요 곰배팔이요 장님이요 귀머거리들 이었다.
거기에다 하나같이 눈가에는 눈곱이 잔뜩 붙어있고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삼촌도 참, 어디서 저런 거지 영감들만 데리고 왔노?
쳇, 덕을 보기는 다 틀려버렸네.'
조카 내외는 기분이 크게 상하여 손님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
솥뚜껑을 쾅쾅 여닫고 바가지를 서로 부딪히고 깨면서 소란을 피웠다.
이에 진묵스님의 권유로 밥상 앞에 앉았던 칠성님들은 하나, 둘 차례로 일어나 떠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지막 칠성님까지 일어서려 하는데 진묵스님이 다가가 붙잡고 사정을 했다.
"철없고 박복한 조카가 아니라, 나를 봐서 한 숟갈이라도 드십시오."
일곱번째 칠성은 진묵스님의 체면을 보아 밥 한술을 뜨고
국 한 숟갈을 먹고 반찬 한 젓가락을 집어 드신 다음 떠나갔고,
진묵스님은 조카를 불러 호통을 쳤다.
"에잇, 이 시원치 않은 놈! 어찌 너는 하는 짓마다
그모양이냐? 내가 너희를 위해 칠성님들을 청하였는데,
손님들 앞에서 그런 패악을 부려 다 그냥 가시도록
만들어? 도무지 복 지을 인연조차 없다니...."
그리고는 돌아서서 집을 나오다가 한 마디를 더 던졌다.
"그래도 마지막 목성대군이 세 숟갈을 잡수셨기 때문에 앞으로 3년은 잘 살 수 있을게다."
이튿날 조카는 장에 나갔다가 돼지 한 마리를 헐값에 사 왔는데,
이 돼지가 며칠 지나지 않아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았고,
몇 달이 지나자 집안에는 돼지가 가득하게 되었다.
또 돼지들을 팔아 암소를 샀는데, 그 소가 송아지 두 마리를 한꺼번에 낳았다.
이렇게 하여 진묵스님의 조카는 3년 동안 아주 부유하게 살았다.
그런데 만 3년째 되는 날 돼지우리에서 불이 나더니,
불이 소 외양간으로 옮겨붙고 다시 안채로 옮겨 붙어, 모든 재산이 사라지고 말았다.
3년의 복이 다하자 다시 박복하기 그지없는 거지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다소는 전설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몇가지 교훈을 새겨볼 수 있다.
첫째는 복을 구하는 사람의 태도이다.
복은 특별한 권능자가 내리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그 어떠한 신도 무조건 복을 줄 수가 없다.
이 복은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다. 복을 담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 갖추어져 있고,
또 정성을 다하면 저절로 다가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칠성님이 오신다기에 열심히 음식을 준비했던
진묵스님 조카의 마음은 성심(誠心)이 아니라 '기대심리'
였고, 상대가 거룩하지 않게 보이자 기대심리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기분마져 상해 칠성들을 쫓는 박복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러한 짓은 진묵스님의 조카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중에서도 이렇게 처신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찌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고 기분따라 움직이는 자가 큰 복을 담을 수 있으랴.
또 한 가지, 모든 복에는 정해진 수명이 있다. 복이 다하면 기울기 마련인 것이다.
이를 부처님께서는 '하늘로 쏘아올린 화살'에 비유하셨다.
하늘로 쏘아올린 화살이 올라가고 있을 때는 기세도 좋고 보기도 좋지만,
그 힘이 다 하면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잘 알아서 우리도 올라가고 있을 때 인연을 소중히 하고 복을 닦아야 한다.

요즈음 우리는 부자로 지내던 사람이 일순간에 파산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실로 안타까운 사연도 많지만,
인연법에서 보면 부자로 살 연이 다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재물뿐만이 아니다. 명예도 권력도 수명도 인연이 다하면 하루 아침에 사라지게 된다.
이 나라에 찾아왔던 IMF사태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인과응보이다. 사치.낭비.거품.정직하지 못한 삶....
참으로 인연법을 잊은 채 살았기 때문에 도래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인연법으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모든 것은 인연이다. 인연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고,
인연이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다.
인연이기 때문에 또다시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일타스님 - 불자의 마음가짐과 수행법에서




....



곡차를 마실만한 그릇 -震默

진묵(震默:1562~1633)선사는 조선조 인조 때 스님으로 법명은 일옥(一玉)이다. 7세에 전주 봉서사에 출가하였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영리하여 경을 막힘 없이 해석하였다. 한번 눈에 �면 외워 누구도 스승이 되어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진묵 선사가 전주의 봉서사에 있을 때였다. 당대의 대유학자 봉곡 선생이 진묵 선사를 초대했다. 술과 가름진 고기를 마련해 놓은 자리에 진묵 선사가 앉자 봉곡 선생이 말했다.
"스님은 술은 아니 드시지만 곡차라면 좋아하시지요? 여기 곡차도 많고 고기도 많으니 한번 마음껏 자셔 보시지요"
진묵 선사가 대답했다.
"그거 참 고마운 일이오. 그러나 나는 양이 커서 한 사발의 곡차나 한 그릇의 물고기 안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으니 주려거든 곡차도 동이로 주시고 고기도 냄비째 주어야 하오."
진묵 대사는 동이째로 술을 마셔 버렸다.

한번은 진묵 선사가 제자와 함께 연못가를 거닐다가 물 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제자에게 물었다.
"얘야 저 물 속에 비친 그림자는 누구의 것이냐?"
"스님의 그림자지 누구의 그림자입니까"
이에 진묵 선사가 말했다.
"너는 어째 석가여래의 그림자로 보지 못하고 단지 진묵의 그림자로만 보느냐?"

진묵 선사가 전라도 부안군 변산의 월명암에 머물 때였다. 시자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속가(俗家)로 가면서 진묵 선사에게 말했다.
"공양을 준비해 놓았으니 때가 되면 드십시오"
"알았다.
이때 월명암의 스님들은 모두 탁발 하러 나가고 진묵 선사 홀로 창에 기대 앉아 문지방에 손을 얹은 채 <능엄경>을 읽고 있었다.
시자가 속가에서 하룻밤 묵고 절에 돌아와 보니 진묵 선사는 전날에 앉ㅇ아 있던 그대로 경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바람에 문이 흔들려 문지방 사이의 손가락을 찧어 피가 흐르는데도 태연스러웠다. 탁상의 공양물도 차려 놓은 그대로였다.
시자가 문안을 드리자 진묵 선사는 그제사 독서삼매에서 깨어나 시자에게 말했다.
"너는 왜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벌써 왔느냐?"

어느날 진묵 선사가 길을 가다가 소년들이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아서 끓이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몸을 구부려 끓는 솥 안을 보며 탄식했다.
" 잘 놀던 고기들이 죄없이 삶아지는 괴로움을 받는구나:"
이에 한 소년이 조롱을 했다.
":스님께서 이 고깃국을 잡숫고 싶은 게로군요.
"암, 준다면야 맛있게 먹지."
"그럼 이 한 솥을 모두 스님께 드릴 터이니 다 드셔 보셔요"
그러자 선사는 구리솥을 번쩍 들어 단숨에 먹어 치웠다. 소년들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금하라 하셨는데 스님은 고깃국을 자셧으니 진짜 스님이 아닙니다."
진묵 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물고기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지만 그것을 살리는 일은 내가 하기에 달렸지."
그리고는 아랫도리를 벗고 냇물을 등지고 앉아 설사를 했다. 그러자 수많은 은빛 물고기들이 진묵 선사의 항문에서 쏟아져 나와 물 위로 솟구치며 뛰놀았다. 진묵 선사는 자유롭게 노니는 물고기들을 보면서 말했다.
"귀여운 물고기들아! 멀리 큰 강으로 가서 다시는 삶아지는 고통을 받지 말거라."

하루는 진묵 선사가 시자를 부르더니 다짜고짜 소금을 가지고 보서사 남쪽 부곡 골짜기로 가라고 하자 시자가 물었다.
"누구에게 갖다 주라는 것입니까?"
"가보면 알게된다."
시자가 소금을 가지고 재를 넘어 골짜기로 내려가니 사냥꾼 두어명이 노루고기를 회쳐 놓고 소금이 없어 먹지 못하고 있었다. 시자가 소금을 갖다 주자 그들은 크게 기뻐하며 말햇다.
"이는 반드시 진묵 노장께서 우리들의 허기를 불쌍히 여겨 보내주신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부처님이 골짜기마다 있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군."


...


진묵대사(震默大師)수행시(修行詩)


奇汝靈山十六愚/ 기여영산십육우

저 영산의 열 여섯 어리석은 자여

樂村齋(齊)飯幾時休/ 요촌재반기시휴

마을의 잿밥을 즐김 언제 쉴 것인가

神通妙用雖難及/ 신통묘용수난급

신통과 묘용은 비록 따르기 어려우나

大道應問老比丘/ 대도응문노비구

대도는 응당 이 늙은 비구에게 물을지어다

天衾地席山爲枕/ 천금지석산위침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月燭雲屛海作樽/ 월촉운병해작준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을 삼아

大醉居然仍起無/ 대취거연잉기무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却嫌長袖掛崑崙/ 각혐장유괘곤륜

도리어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되노라



...


진묵대사의 일화 모음



태 안의 열 달 은혜
무엇으로 다 갚사오며
무릎 아래 세 해 양육
잊을 수 있겠나이까.
만세 위 다시 만세 더하여도
자신의 마음 오히려 미홉한데
백년 안에서
백년을 다 못 채우시니
어머님 수명
어이 그리 짧으시나이까.

표주박 하나 들고
길에서 행걸하는 이 중은
이미 그렇다 하거니와
비낀 비녀로 안방에서
혼인 못한 저 누이동생은
가엾지 않습니까.

상단의 불공 끝나고
하단의 제사마저 파하여
스님들 각기
제 방으로 돌아가고
앞산 첩첩 뒷산 중중한데
어머님 그 외로운 혼
어디메로 가셨나이까.
아아! 슬프고 슬프옵니다.

이 시는 진묵대사 일옥 스님이 어머님 제사를 지내면서 지은 제문이다.
진묵대사는 효자스님으로 유명하다. 출가인들이 대체적으로 속가의
부모형제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는데 진묵대사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1562년에 태어나 1633년에 세상을 떠났다. 70여 년의 생애에서 기이한
일화들도 많이 남겼다.

대사가 사미로 있을 때였다. 창원 마산마포를 지니다가 우연히 어떤 동녀의
사랑을 받았다. 둘은 서로 사랑을 했다. 일옥사미는 불계를 파할 수 없었으나
인간의 고귀한 사랑도 저버릴 수없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녀는 일옥과의 사랑을 인연으로 하여 사람으로 다시 환생하였다.
사내아이였다.
점차 자라 여남은 살이 되자 전주에 있는 대원사로 출가하여 중이 되었고,
거기서 대사를 만나 시봉이 되었다. 이름을 기춘이라 했다.
대사는 늘 기춘과 더불어 이락삼매에 들곤 했는데 이락삼매란 색계의 제4
선천에서나 즐기는 삼매였다. 즉, 모든 욕락을 여의고 열반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그런 삼매였다.
그렇게 해서 대사와 시봉 기춘은 항상 함께 다녔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우나 즐거우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두 사람은 떨어질 줄 몰랐다.
하루는 그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스님네가 있었다.
그들은 두 스님을 골탕 먹이고 싶었다. 한 스님이 대사에게 말했다.
"스님, 기춘을 시봉으로 두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수 한 그릇 내셔야지요."
일옥스님, 즉 진묵대사가 말했다.
"그야 어려울 것 없네. 자네들 바리때나 내어들 놓으시게."
스님들은 제작기 바랑을 풀고 바리때를 꺼내어 앞에 놓았다.
"자, 이것이 국수일세. 많이들 자시게."
한데 머사가 담아 주는 것은 국수가 아니고 바늘 한 개씩이없다.
스님늬들은 바늘 한 개씩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스님, 이것은 바늘이 아닙니까?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하십니까?"
"먹기 싫으면 그냥들 보고만 있게."
대사의 발우에 담긴 바늘은 갑자기 수십 개 수백 개로 변하더니, 그것이
다시 국수가락으로 변했다. 대사는 물을 부어 맛있게 들었다.
스님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다시 다물 줄을 몰랐다.
대사는 전주 왜막촌에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대사는 그 마을 뒷산에 있는
일출암에 주석하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왜막촌을 오르내렸다.
여름이 되면 모기가 매우 극성을 떨었다. 아무리 모깃불을 놓아도 왜막촌의
모기는 극성스러웠다. 대사는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산신에게 명했다.
"앞으로는 일체 모기를 이곳에 머물지 못하게 하라. 만일 그러지 않으면 내
혼을 내 줄 것이다."
그날부터 모기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대사의 도력에 다시금 감탄하면서
생불이 오셨다고 칭송 하였다.
그렇게 어머니를 봉양하였지만 주어진 천명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는
숙한으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대사가 제문을 지은것이 앞에 나온시다.
대사는 그의 어머니를 만경현 북쪽에 있는 유앙산에 안장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누구나 대사의 어머니 무덤에
술과 떡, 과일 포 둥을 준비해 제사를 지내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마을 사람들은 물론 멀고 가까운 모든 이웃마을
사람들까지도 앞다투어 와서 제사를 지내곤 했고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향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봉분이나 묘역도 옛날 그대로이고.
하루는 절에서 불사를 하는데 부전을 뽑았다. 대사가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렸는데 대중들은 한결같이 대사에게 부전을 보라고 하였다.
"일옥수좌가 나이도 어리거니와 행이 가장 청정합니다. 그에게 부전을 시켜
불단을 호위하고 향로를 받드는 소임을 맡김이 좋겠습니다."
주지가 일옥스님의 의중을 떠 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일옥스님이 말했습니다.
"저야 뭐든 시켜 주시면 하겠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 주지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밀적금강신이 나타나
주지에게 말했다.
"일옥스님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들인데 오히려 부처님에게 예경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빨리 부전 소임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 주시기 바랍니다."
주지는 꿈을 깨고 나서 비로소 일옥스님이 대도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속히
다른 스님에게 부전을 맡겼다.
그 후 밀적금강신이 다시 주지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이제야 안심하고 부처님의 호위 소임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대중들도 일옥스님을 다시 보게 되었다.
대사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술'이라 하면 마시지 않고 '곡차'라하면 마시는 것이었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잔치를 베풀려고 술을 거르고 있었다. 술의 향기가
도량 전체에 퍼지자 대사는 구장을 짚고 술거르는 스님에게 가서 물었다.
"지금 거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술입니다."
대사는 잠자코 돌아왔다. 잠시 후 다시 술 거르는 스님 앞에 나타나
물었다.
"자네, 지금 거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예, 술을 거르고 있습니다, 큰스님."
대사가 다시 물어보자 술 거르던 스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금 있다가
대사가 다시 찾아가 물었다.,
"여보게, 지금 자네가 거르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술이라니까요. 큰스님께서는 보시면서도 왜 자꾸 물으십니까?"
그는 끝내 곡차라 하지 않고 술이라 대답했다. 그것은 대사가 곡차라고
해야만 술을 마신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사는 실망을 머금고
방장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금강역사가 술 거르던 스님을 철퇴로 내려쳤다.
대사가 하루는 시자를 불렀다.
"기춘아."
시자가 대답하고 즉시 달려오니 대사는 시자에게 소금을 준비하라 했다.
시자가 준비를 마치고 보고하자 대사가 말했다.
"그 소금을 가지고 속히 봉서사 남쪽의 부곡으로 달려가거라."
"가서 누구에게 주어야 합니까?"
"그곳에 가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니 구태여 지금 물을 게 없느니라."
시자가 소금을 가지고 봉서사 남쪽의 재를 넘어 며느리골, 즉 부곡으로
갔다. 거기에는 사냥꾼 몇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있었다.
"아구, 어서 오시오. 시자스님."
"그래 무엇들을 하고 계십니까?"
"예, 지금 우리가 노루를 한 마리 잡아서 불에 굽기는 했는데 소금이
없어서 이러고들 있습니다."
"소금이라면 여기 있습니다."
사냥꾼들이 놀라면서 물었다.
"아니, 어떻게 때맞춰 소금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우리 진묵 큰스님께서 소금을 가지고 부곡으로 빨리 가 보라 하셔서
왔습니다. 이제 보니 큰스님께서 여러분들을 생각하고 보내신 것 같군요."
사냥꾼들은 저마다 대사의 예지력에 찬사를 보냈다.
하루는 대사가 점심 공양을 하다 말고 갑자기 물을 찾았다. 시자가 급한
김에 따뜻한 물을 올린다는 것이 뜨물을 갖다 드렸다. 대사는 그 뜨물을 받아
입에 한 모금 물고는 동쪽을 향해 내뿜었다. 그러자 뜨물은 물방울을 지니며
삽시간에 날아가 버렸다. 대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공양을 시작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때 합천 해인사에 화재가 일어나 절이 다타게 되었는데
난데없는 서쪽에서 먹장구름이 밀려 오더니 삽시간에 소나기를 퍼부어 화지를
진압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그 빗물은 모두 희뿌연 색깔을 띠고 있었으며 어디에나 묻으면
허옇게 얼룩이 지곤 했다 한다. 마침 그 불이 일어난 날이 대사가 점심공양
중에 뜨물을 머금어 뿜은 날이었다고 한다.

대사가 상운암에 주석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큰스님이 계신다고 하니깐
많은 납자들이 몰려들었다. 절에 비해 식구가 많다 보니 양식이 곧잘
떨어지곤 했다.
한 번은 대중스님들이 양식을 구하러 대처로 나갔다. 양식은 구했지만
장마가 계속되는 바람에 홍수가 나서 절로 돌아올 수 없었다. 시자마저도 다
떠난 텅 빈 절이었다. 대중들은 걱정을 했다.
"양식도 떨어졌는데 큰스님께서는 어떻게 지내실까?"
"글쎄 말이야. 시자까지 함께 나왔으니 큰일인걸."
"큰스님은 도력이 있으시니까 아마도 잘 해결하고 계실지 몰라."
"도력도 도력 나름이지. 어떻게 드시지도 않고 도력이 나오겠나."
대중들은 장마가 그치기를 기다려 한 달이 넘어서야 상운암으로 돌아왔다.
걱정은 했지만 상운암에 도착하여 대사를 뵙고는 깜짝 놀랐다.
머리에는 새가 집을 지었고 얼굴에는 거미줄이 얽혀 있었다. 그리고 무릎
사이로 풀이 돋아나 벌써 배꼽 이상 올라와 있었다. 대중들은 거미줄을 걷어
내고 새집을 치워 버리는 등 온갖 부산을 떨고 나서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대사가 말했다.
"양식 구하러 나간 사람들이 양식은 어떻게 하고 이처럼 빨리 돌아왔느냐?"
대사는 일행삼매에 들어 시간을 초월해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은 변산에 있는 월명암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겨울 결제가 임박해
오자 대중들은 겨울 양식 준비다 행걸이다 해서 모두 떠나고 대사는 시자와
단 둘이 절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시자가 말했다,
"큰스님, 속가의 저의 어머니 기일이 오늘 저녁입니다. 다녀와야겠습니다."
대사가 말했다.
"그렇게 하려무나. 아무리 출가한 사문이라 해도 부모의 은혜를 저버려서는
안 되느니. 아무 염려 말고 다녀오너라."
"스님께서 드실 공양상을 보아 놓았으니 시장하시면 드십시오."
"그렇게 하겠네."
그때 대사는 방장실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문지방에 손을 얹어 놓은 채
(능엄경)을 보고 있었다.
이튼날 시자가 제사를 마치고 월명암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대사는 아직도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은 채 문지방에 손을 얹어놓고 경만 보고 있었다.
바람에 창문이 닫히면서 손가락을 찧어 으깨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손을
거두지도 않은 채였다. 시자가 놀라면서 물었다.
"큰스님, 시자 기춘이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큰스님, 손을 다치셨군요?"
대사가 말했다.
"어, 그래? 나는 몰랐었구나. 그나저나 너는 제사 지내러 간다던 사람이
어찌하여 제사 참레도 하지 않고 이토록 빨리 돌아왔느냐?"
대사는 수능엄삼매 들어 밤이 가도 시간이 흐르는 것을 초월해 있었다.

대사가 혼자 길을 가고 있었다. 산천도 구경하고 혼자만의 기쁨도 누리면서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떤 사미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요수천가에 이르렀을 때다. 사미가 대사를 돌아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큰스님, 제가 먼저 건너가 보겠습니다. 물이 얕은지 깊은지 알아보고
말씀드리지요."
"그렇게 하시게."
사미가 신발을 벗어 들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갔다. 사미가 건너는
모양새로 보아 물이 깊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대사도 그를 따라 옷도 벗지
않은 채 건넜다. 그런데 이에 웬일인가. 대사가 물에 빠져 곤욕을 치르자
사미가 얼른 되돌아 와서 부축하였다. 대사는 나한의 장난인 줄 알고 나서
게송을 읊었다.

너희 열여섯 명의
영축산 나한들이여!
요수천의 밥 먹기를
언지부터 그만두었는가.
그대들의 신통묘용을
내 따르지는 못하지만
위대한 도는
이 늙은 비구에게 물어 보라.

전주 청량산 목부암에 주석하고 있을 때였다. 대사가 그리로 옮기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바람도 구름도 없이 맑은 날 밤이면 성좌를 알 수 없는 별 하나가 멀리
동쪽 들녘 끝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기고 찾아간 곳이
바로 목부암이었다. 대사는 이 목부암에 이르러 암자 이름을 원등암이라
고쳤다. 그것은 멀리까지 암자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인다는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본디 목부암은 나한도량이었다. 열여섯 분의 나한들이 모셔져
있었다.나한들은 목부암 불빛을 대사에게 비쳤는데 그것은 대사의 뜻을
계발하기 위함이었다. 나한들은 월명암의 진묵대사를 오래 전부터 존경해
왔던 것이다.

전주부에 어떤 이름없는 아전이 있었다. 그는 평소 대사와 아주 가까이
지내는 터수였다.
어느 날 그 아전은 관청의 물건을 몰래 훔쳐 달아나려다 대사에게 들켰다.
대사가 가엾은 표정으로 말했다.
"흠보, 즉 관청의 공적인 물건을 사사로이 써 버림이 어찌 사내대장부로서
할 일이겠는가. 그러지 말고 그 훔친 물건은 도로 관청의 제자리에 갖다 놓고
대신 쌀 몇 말을 가져다 저 나한들에게 공양하게. 그러면 머지않아 좋은일이
있을 것이네."
아전은 부끄러워하면서 돌아갔다. 잠시 후 아전이 쌀 몇 말을 지고 왔다.
대사가 말했다.
"참 잘했네. 그 쌀로 공양을 지어 나한님들에게 올리게."
아전은 손수 공양간에 들어가 밥을 지어 나한님께 올려다. 대사가 말했다.
"전주 부청에 혹 빈자리가 있지 않던가?"
"감옥의 형리 자리가 잠시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봉급이 매우 박하고
그다지 할 일도 없는 그러한 자리입니다."
"일도 있고 없고는 그만두고 얼른 가서 그 자리를 자청하여 맡도록 하게나.
앞으로 한 달 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네."
"정말 그럴까요?"
"허! 이 사람 속아만 살아왔나!"
아전이 돌아가고 나서 대사가 나한전에 들어갔다. 대사는 들고 있던
주장자로 나한들의 머리를 세 번씩 두드리고 말았다.
"그대들은 방금 그대들에게 공양 올린 아전을 눈여겨보았겠지? 세상에는
공짜란 없는 법이다. 그러니 그 아전의 일을 잘 도와주도록 하라."
그 이튿날 아전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나한이 나타나 꾸짖어 말했다.
"너는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들에게 직접 청탁할 일이지 어찌하여 스승인
큰스님께 아뢰어 우리를 주장자로 맞게 만드느냐?"
아전이 꿈속에서 말했다.
"큰스님께서 주장자로 때렸다고요? 어째서요?"
"이유는 알 필요 없다. 하여간 이번 일은 우리 스승님의 명령이니
도와주겠다. 그러다 앞으로 다시 그러한 일이 있을 때는 어림도 없는 줄
알아라."
"잘 알겠습니다, 나한님들."
꿈을 깨고 낭아전은 곧바로 전주 부청에 달려가 옥리 자리를 자청했다.
전주 군수도 그 자리를 선뜻 내맡겼다. 그러지 않아도 봉급이 박한 자리라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던 것을 자청해서 맡으려 하니 전주 군수로서는 다행
중 다행이었다.
송사는 계속해서 일어났고 송사가 있을 때마다 수당이 지급되었다. 아전은
생각보다 꽤나 넉넉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새 한 달이 지나갔다.
하루는 전주군주가 아전을 불러 호방의 자리가 비었으니 그리 옳겨 앉으라
하였다. 아전은 비로서 나한님의 공덕과 대사의 덕화를 느꼈다.
그런데 한 번 배운 도둑질은 쉽사리 그만둘 수 없었는지, 뇌물을 받은 것이
발각되어 호방이 된 지 석 달만에 옥고를 치렀다고한다.

하루는 대사가 길을 가는 도중에 시냇가에서 고기잡는 소년들을 발견했다.
마침 아이들은 고기를 잡아 그것으로 추어탕을 만들고 있었다. 냄비에세는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추어탕이 끓고 있었다. 대사가 가까이 가서 한
소년에게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소년이 대답했다.
"추어탕입니다, 스님."
대사가 탄식을 하며 말했다.
"이 가엾은 물고기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괜스레 화탕지옥의 고통을
받는구나, 쯧쯧."
한 소년이 물었다.
"스님, 한 그릇 떠 드릴까요?"
"음, 거 좋지. 나도 잘 먹느니라,"
"그러, 한 그릇 드릴 테니 다 드십시오. 저희들 무안하게 하시지
마시거요."
대사가 추어탕을 맛있게 들자 한 소년이 대뜸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살생하지 말라 하셨지요, 스님?"
"그러셨느니라."
"그런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고깃국을 드십나까? 이는 불살생의 계를 범한
것이 아닙니까?"
소년의 질문은 제법 날카로웠다. 대사가 말했다.
"살생은 너희들이 했지. 나는 먹기만 했느니라. 그러나 나는 너희들이 죽인
고기들을 죄다 살려 줄 수 있느니라."
소년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한 번 보여 주시지요. 그렇게만 하시면 저희들이 스님을 믿고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대사는 그러마 대답을 하고 물을 등지고 앉아 배설을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대사의 배설물은 모두 물고기로 변하여 기세 좋게 물결을
헤치고 헤엄쳐 갔다. 대사가 물고기들을 보며 말했다.
"이 놈의 물고기들아, 지금부터는 멀리 강이나 바다로 나가 놀아라. 그리고
낚시밥을 물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까딱하면 다시 화탕지옥의 고통을 받게
되느니라. 알겠느냐?"
대사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꼬리를 한 번씩 툭툭 치고는 물속으로 사라졌다.
소년들도 대사의 일거일동 주시하고는 감탄하면서 낚시와 그물을 걷어
올렸다.
전주 대워사에서 주석하고 있을 때였다. 대사는 공양 때마다 밀기울을 물에
타마시곤 했다. 대중들은 먹지 않았다. 밋밋하고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양식이 풍부한 것도 아니었지만, 하여간 대중스님네는 밀기울 먹기를
꺼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직 공양은 준비되지 않았고 때는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나 있었다. 대사가 선정에 들어 법희선열의 기쁨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웬 스님이 발우를 가지고 내려왔다. 발우에는 흰 쌀밥이
가득 답겨 있었다. 대사가 말했다.
"공양만 보냈으면 되었지, 무엇하러 번거롭게 친히 왔는가?"
그 스님이 대답했다.
"소승은 현재 해남의 대둔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마침 점심 공양 때라
식사를 하려고 발우에 밥을 받았는데 갑자기 발우가 공중으로 뜨는 게
아니겠습니까? 해서 발우를 붙잡았는데 저도 모르게 어떤 신력에 의해
여기까지 날아온 것입니다."
대사가 공양을 청하게 되 까닭을 말하자 그 스님은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큰스님께서 드시는 공양은 앞으로 제가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겠는가?"
"소승은 영광이옵지요."
그 스님은 대사에게 예배하고 대사의 공양이 공양이 끝나기를 기다려
발우를 드니 삽시간에 다시 대둔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4년 동안 해남의 대둔사와 전주의 대원사를 공앵발우가 오가곤 했다.
대사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밥투정을 한 과보로써 이 절은 앞으로 7대에 걸쳐 가난한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과연 대사의 말대로 대원사는 지금까지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져
가난하다고 한다.
광해군 14년(1622), 대사의 나이 61세 때 일이다. 전주의 송광사와 홍성의
무량사에서는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불상을 조성하여 점안법회를 열었다.
그리고 두 절에서는 동시에 대사를 증명법사로 초빙했다. 그러나 대사는
어느쪽에도 가지 않았다. 대신 신표를 하나씩 보내어 증명단에 안치하고
점안법회를 하도록 일렀다. 그리고 훈계도 잊지 않았다.
"이 신표를 모시고 점안법회를 하게 되면 존상은 원만상을 성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는 불사한답시고 무조건 존상에 개금하지 말라."
그리고 무량사 주지에게는 특별히 주의를 주었다.
"무량사의 화주스님은 점안하기 전에는 결코 산문 밖을 나가지 말라.
명심하라."
그런데 무량사의 불상은 홍성 사람이 혼자 3천 금을 대어 조성한 것이었다.
무량사로서는 아주 큰 시주였다. 점안법회 시간이 다가왔는데도 그 시주가
오지 않자 화주를 책임졌던 스님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참 이상하다. 어찌하여 이 시주님이 아직 도착을 못하고 있는 것일까?"
화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산문 밖까지 나갔다.
나중에 그는 어떤 갑사에게 피살되어 시체로 발견되었다 한다.
대사는 말년을 전주의 봉서사에 보냈다. 봉서사라면 그가 일곱살 때에
출가한 절이다. 거기서 내전과 외전을 배웠고 사미로 성장한 절이었다.
그 절에서 멀지 않은 곳에 봉곡선생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덕망과
학식을 두루 겸한 고매한 사람이었다. 대사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로, 서로
트고 지내는 터수였다.
한 번은 대사가 봉곡선생을 찾았다.
"봉곡선생, 그 강목 좀 빌려 주시겠소이까? 왜 있잖소. 거누구
어록이라던가?"
봉곡선생이 알아차리고 옆에 놓았던 책 한 권을 빌려 주었다. 대사는 그
책을 받아들이고 말했다.
"모두 12권이라던데 이 한 권만 빌려 주시면 나머지는 언제 보겠습니까?
아주 12권을 함께 빌려 주구려."
"아무리 대사가 총명하기로서니 한 권을 읽는 데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열흘씩은 걸려야 할 거요."
"하여간 함께 주셨으면 합니다."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시구려."
대사는 어록 12권을 빌려 바랑에 넣어 가지고 갔다. 봉곡선생이 사람을
시켜 대사의 뒤를 밟게 했다. 대사 또한 미행자가 있음을 눈치채고는 책 한
권씩 빼어 다 읽고는 길 옆에 던져 버렸다. 그렇게 해서 봉서사까지 오는
동안 12권을 모조리 읽었고 또 모두 길 옆에 던져 놓았다.
봉곡선생의 심부름을 맡은 사람은 대사가 버리는 책을 주섬주섬 주워서
돌아가 버렸다.
뒷날 대사가 봉곡선생을 찾아가 수인사를 나누자 봉곡선생이 말했다.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빌려 간 소중한 책들을 모두 길가에 던져 버리셨소.
내 사람을 시켜 거두어 오기는 했소이다만..."
대사가 말했다.
"아, 그러셨소이까? 그야 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에는 집착하지 말아야 되는
게 아닙니까? 나와 선생의 차이점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소이다. 나는
읽고 난 책은 버리고 선생은 다 읽고 난 책을 다시 주워 모으고 말이오.
허허."
봉곡선생이 말했다.
"무슨 뜻인지 자세히 알아듣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이까?"
"예, 통발의 목적은 고기를 잡는 데 있고 뗏목의 목적은 강을 건너는 데
있으며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소이다. 만일 고기를
잡고도 통발에 집착하거나 강을 건너고도 뗏목에 집착한다면 되겠소이까?
손가락을 펴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만 보고 있으면
되겠소이까?"
봉곡선생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 그 어록의 내용을 죄다 이해하셨소이까?"
그리고 모든 내용을 책을 펼쳐 가면서 물어 보았다. 대사는 한 글자 한
구절도 틀리지 않고 모두 대답하였다. 봉곡선생도 그제서야 대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봉곡선생이 어느 날 저녁을 준비해 놓고 대사를 초빙했다. 그리고 동비에게
모셔 오도록 일러 놓았다. 동비가 봉서사로 대사를 모시러 가다가 우연히
길에서 대사와 마주쳤다. 동비가 봉곡선생의 말을 전했다.
"선생님께서 큰스님을 모셔 오라기에 제가 이렇게 왔습니다."
그때 대사는 허공을 바라보면서 배회하고 서 있었다. 대사는 동비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너는 아들을 낳고 싶지 않느냐?"
동비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면서 대답을 못하고 있자 대사가 다시
말했다.
"네가 복이 없어서 그런 것을 누구를 탓하겠느냐. 가서 선생께 아뢰어라.
내가 곧 가겠노라고."
동비가 돌아와 그대로 아뢰니 봉곡선생은 대사의 얘기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물었다.
"그래, 너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단 말이지?"
봉곡선생이 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늦게 대사가 도착하자 봉곡이
말했다.
"어찌하여 이리도 늦으셨소이까?"
대사가 말했다.
"오다 보니 마침 서쪽 하늘 저편에서 한 줄기 신령스런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었소. 그것은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서기지요. 해서 내가 그것을 붙잡아
어디다 쏟고 싶었으나 쏟을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소이다. 또 그것이
좋지 않은 척박한 땅에 흘러들어갈까 염려스럽기도 했고요."
"그래서요?"
"그래서 어쩌겠소이까. 그 신령스러운 기운을 부수어 멀리 허공 밖으로
보내고 오는 길이오. 그래서 좀 늦어졌소이다. 미안하외다. 허허허."
"..."
대사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대중들을 모아 놓고 후사를 당부하던 중 게송을
읊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로 삼으며
산을 베개로 삼네.
달과 촛불과 구름으로 병풍을 삼고
바다를 술로 삼았지.
크게 취하여
그대로 일어나 한바탕 춤을 추니
오히려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리는구나.

며칠 후 대사는 시냇가를 거닐다가 물 속의 자기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시자에게 말했다.
"저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그림자이니라."
시자가 말했다.
"큰스님, 저것은 큰스님의 그림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대사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시자야, 너는 다만 나의 가짜만 알고 석가의 진짜는 모르는구나."
"?"
대사는 주장자를 메고 절로 돌아와 방장실에 앉았다. 많은 대중들이 모여
들었다. 대사가 가부좌를 한 채 말했다.
"나는 지금 곧 가리라. 자네들 중에 혹 의심나는 것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묻도록 하라."
한 제자가 말했다.
"큰스님께서 열반하시고 나서 백년이 지난 뒤에는 그 종풍을 누가
이어받겠습니까?"
대사가 말했다.
"종풍이라. 무슨 종풍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선은 정장로에게 부촉하노니
그리 알라."
그리고는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


정귀미ㅣ푸른차문화연구원 연구생

대사가 변산(邊山)의 월명암(月明庵)에 계실 때 이야기다. 대중들은 모두 탁발을 나가고 대사만이 오직 시자와 더불어 절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시자가 속가 집에 급한 용무가 생겼다.
시자는 먼저 재공(齋供)을 갖추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대사께 여쭙기를 “공구(供具)는 여기에 있으니 때가 되거든 친히 재를 올리십시오” 하였다.
이 때 대사는 방 안에서 창문을 밀치고 손을 문지방에 대고서 능엄경(楞嚴經)을 보고 있었다.
시자가 이튿날 암자에 돌아와 보니 대사는 어제와 같은 자세로 그곳에 앉아 경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대사는 바람이 불어 문짝이 닫히는 바람에 손가락이 상하여 피가 흐르는데도 손의 상처도 잊고 태연히 경을 보고 있었으며, 탁자 위의 재공도 불공을 올리지 않은채 그대로였다. 시자가 절을 하고 밤새의 안후(顔候)를 살폈더니 대사는 말씀하기를, “너는 제사에 참례하지 않고 왜 바로 왔느냐”고 하였다.
대사는 밤이 이미 지난 줄도 모를만큼 능엄삼매(楞嚴三昧)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또한 대사가 교를 멀리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대사의 수행력을 보여주는 일화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하루는 대사가 상운암(上雲庵)에 주할 때 탁발승들이 식량을 구하려 멀리 나갔다가 한달 남짓 지나 돌아왔는데, 대사는 얼굴에 거미줄이 쳐있고 무릎 사이에 먼지가 쌓인채로 있었다.
선정에 얼마나 깊이 들었던가를 엿보게 한다.
대사가 이들이 돌아왔음을 뒤늦게 알고는 “너희들이 어찌 이리 빨리 돌아왔더냐”고 하였다. 대사의 구도 정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대사는 또한 전주시장에 다니며 마음공부를 하곤 했는데, 시장에 내놓은 물건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오늘은 시장을 잘못 보았다”고 하고, 동하지 않으면 “오늘은 시장을 정말 잘 보았다”고 말했다는 구전도 전한다.
산에서만 머물며 공부하지 않고 현실 속에서도 항상 공부한 대사의 구도열을 전한 것이라 하겠다.

나한을 혼내 준 진묵대사
진묵대사는 나한(羅漢)들의 호위를 받고 또 그들을 혼내 주기도 했던 스님으로도 유명하다. 나한이란 소승의 최상위를 얻은 아라한(阿羅漢)들을 뜻하며, 신통력이 뛰어나고 사찰과 큰스님을 호위하는 존재로 전해진다.
대사에 얽힌 나한 이야기는 여럿이 전한다.
대사가 월명암에서 공부할 때, 맑게 갠 날 밤이면 으레 한 점 별빛이 멀리 동쪽 들 밖에서 반짝거렸다. 살펴 알아보니 바로 청량산 목부암(木鳧庵)의 등불이었다.
대사는 마침내 그곳으로 주석을 옮기고 목부암을 원등암(遠燈庵)이라 고쳐 불렀다. 이곳은 본래 나한의 도량으로서 16나한존자들이 그후 항상 대사를 위하여 시봉했다고 하며, 불빛이 멀리 월명암까지 비친 것도 나한들이 대사의 뜻을 열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이었다.
평소 대사와 교분이 있는 아전이 관가의 물품을 사사로이 소비하고 숨어다니다 대사를 찾아왔다. 대사가 “남아가 하지 못할 일을 저질렀구나. 두어말 쌀을 나한에게 공양하면 좋은 도리가 있으리라” 하였다. 아전이 돌아가자 대사는 주장자를 가지고 나한당에 들어가 차례로 그들의 머리를 세번씩 두드리며 힘주어 말하였다.
“아무개 아전의 일을 잘 돌보아주라.” 하루는 나한들이 아전의 꿈에 나타나 “구할 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바로 와 말할 것이지, 왜 대사에게 아뢰어 우리를 괴롭히느냐. 대사의 명이라 좇는다만 다음부터는 이같은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한을 혼내 준 스님의 경지는 그야말로 아무나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경지라 하겠다. 대사는 술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술을 곡차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았다.
곡차(穀茶)란 곡식으로 빚은 차라는 뜻으로 불가에서 술을 고상하게 지칭하는 말. 하루는 어떤 사문이 잔치를 베풀기 위해 술을 거르는데 그 향기가 진하게 풍겨 대사의 입맛을 돋구었다. 대사가 석장을 짚고 그 사문에게 가서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거르느냐” 하니 그 사문이 “술을 거른다”고 하였다. 대사는 묵묵히 돌아왔다.
곡차라 하지 않고 술이라 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몇 차례 또 가서 똑같이 묻자 말귀를 못알아 들었는지 아니면 술이 아까워 주기가 싫어서 일부러 능청을 떨었는지는 모르나 그 사문은 역시 같은 대답을 하였다.
대사는 희망을 잃고 돌아왔다. 얼마 후 술 거르는 사문이 머리를 크게 다쳤다.
금강력사가 대사를 놀린 사문을 혼내주고자 철퇴로 내리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음주는 불가에서 계율로 엄하게 금하고 있는 항목이다. 술을 마심으로써 실수가 잦고 그밖의 계율을 허물어뜨릴 개연성이 높아서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어떤 폭군은 음주를 했을 때에만 포악함이 사라져 부처님은 그에게 “술 마시는 것으로 계를 삼으라”(飮酎爲戒)고 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술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심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들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계율은 상당히 신축적인 면이 있어 일종의 율법지상주의를 깨트리는 고승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또한 계율을 어기는 법을 ‘지범개차법(持犯開遮法 ; 지키고 범하며 열고 닫는 법)’이라 하여 일종의 슬기로운 방편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유의할 점은 과연 계율에 마음에 걸림이 없을만한 경지에 참으로 들어섰는가와, 그 방편상의 파계가 일으킨 이익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고 중생에게 회향되고 있는가이다. 많은 율사들이 경계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점이다. 한편 대사의 곡차잔은 그 크기가 무려 한말 반짜리였다고 한다.
지금도 스님이 입적한 음력 10월 28일 제삿날, 영전에 곡차를 올리면 그 곡차가 조금 줄어든다고 전한다. 대사가 곡차를 무척 좋아하신 것은 사실인가 보다.
한번은 대사께서 혼자 길을 걷다 한 사미를 만나 동행케 되었다. 요수천(樂水川)가에 이르자 그 사미가 “소승이 먼저 건너가 깊이를 알아보겠습니다” 하고는 아주 가벼이 건너갔다.
대사가 얕은 줄 알고 뒤를 따르는데 몸이 물속에 풍덩 빠졌다. 사미가 급히 와 대사를 붙드니 대사가 대뜸 나한의 장난인줄 알고 그 짓궂음을 꾸짖었다.
이 때 대사의 꾸짖음이 게송으로 전한다.

“저 영산의 열여섯 어리석은 나한들아
〔寄汝靈山十六愚〕
마을의 잿밥 즐김 언제나 쉬려느냐
〔樂村齋飯幾時休〕
그 신통과 묘용은 따르기 어려우나
〔神通妙用雖難及〕
대도는 응당 이 늙은 비구에게 묻거라”
〔大道應問老比丘〕

작은 신통력을 가지고 잔재주를 부리는 술수를 불교의 구도의 과정에서는 경계한다.
도란 그런 술수가 아니라 삶의 참된 근원을 찾는 길이며 그 안목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진묵대사는 많은 이적을 보인 기승으로도 유명하다.

뛰어난 신통력으로 이적을 보이다
봉서사에 대사가 주석할 때, 큰방은 왠지 불을 안 때도 따뜻했다. 대사가 입적한 뒤 대중들이 이유를 알고자 구들을 뜯어보았다. 아무런 구조상의 특이한 점이 없었다.
다만 구들을 거의 다 뜯어낼 무렵 장태만한 불덩이가 휙 하늘로 날아갔고 이것은 진묵의 조화라 전한다. 스님이 사미로 있을 때 창원 마산포를 지나는데, 어떤 처녀가 대사를 보더니 첫 눈에 연모의 정을 깊이 느꼈다.
대사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지만 대사는 자기는 갈 길이 따로 있다며 한사코 거부했다. 그녀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죽어 남자로 태어나 대사와 함께 할 수 있기를 염원하며 마침내 목숨을 끊었다. 대사가 전주 대원사(大元寺)에 머물 때 기춘(奇春)이라는 한 사미가 출가해 대사를 시봉하게 되었는데 항상 대사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대사를 모셨다.
이 기춘이라는 시자가 바로 그 몸을 바꾼 마산포 처녀였다고 전한다.
한번은 대사가 시자 기춘을 불러 소금을 갖고 봉서사 남쪽 부곡(婦谷)으로 가게 했다.
시자가 영문을 모른채 그곳에 가니 사냥꾼들이 노루고기 회를 해놓고는 소금이 없어 먹지 못하고 있다가 크게 반겨 주었다. 손바닥으로만 가려도 보지 못하는 게 중생들의 육안(肉眼)이나 이같이 못 볼 곳을 보는 도인들의 이야기는 오히려 흔할 정도다. 또 수황사에 대사가 머물 때 끼니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대사는 이웃 대원사(大元寺)로 가 공양거리를 얻어 먹었다.
그런데 대원사 대중들은 대사가 공양을 하러오면 자기들은 쌀밥을 먹으면서 대사에게는 비지를 주는 등 박대한 적이 많았다.
그후 어느 때부터인가 대원사는 3백년간 가난한 절이 되었고 수황사는 손님이 오는만큼 쌀바위에서 쌀이 쏟아졌다고 전한다. 1622년에 전주 송광사와 부여 무량사에서 동시에 불상 모시고 증사(證師)로 대사를 청했다. 대사는 두 절에 각각 주장자와 수주(數珠)를 주며 “뒤에 경솔히 다시 고쳐 칠하지 말라”하고 또 “무량사 화주승은 불상 점안(點眼 ; 불상 눈동자에 점을 찍는 의식) 전에는 절문을 나서지 말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송광사 증단에 세운 대사의 주장자는 밤낮으로 꼿꼿이 서서 넘어지지 않았으며, 무량사 수주는 저절로 소리를 내며 굴렀다. 한편 무량사 화주승은 삼존불 독(獨)시주자를 마중 나가다 자신도 모르게 문밖을 나섰는데 갑사(甲士)에게 그날 맞아 죽었다고. 도인의 말을 가볍게 듣다가는 화를 당하는 법이지. 백양사 운문암에 진묵대사가 주석할 때, 개금불사(改金佛事 ; 불상에 금을 입힘)가 회향되었다. 대사는 대중에게 부촉했다.
“내가 다시 와서 불사를 하기 전에는 불상에다 손을 대지 말라.”
그래서 그후로는 오늘까지 운문암 불상은 개금을 하지 않고 있다. 소년들이 물고기를 잡아 끓이는 것을 보고 대사가 측은해 하자 한 소년이 짓궂게 물었다.
“스님께서도 고깃국을 드실 줄 아십니까?”
“나? 그야 잘 먹지” 하고는 함께 그것을 먹었다.
소년들이 의아해 하자 대사가 의중을 알고 “죽인 것은 내가 아니나 살리는 것은 내게 있다”고 하고는 옷을 벗고 물에다 항문을 대고 힘을 쓰니 물고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사가 도로 살아나 헤엄쳐 가는 물고기들에게 당부했다. “고기들아, 먼 바다로 가서 놀되 다시는 미끼를 탐하다 가마솥에 삶기는 괴로움을 당하지 말아라.” 금강경에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키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말씀이 있다.
이런 경지라면 고기와 채소가 무엇이 다를까. 하루는 대사가 물을 찾기에 미지근한 쌀뜨물을 갖다드렸다. 대사는 그걸 입에 머금더니 동쪽으로 훅 향해 뿜었다. 대중들이 한참 뒤에 들으니 그날 합천 해인사에 불이 났는데 서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한바탕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져 그 불을 껐다고 하였다.
일설에는 솔잎에 물을 적셔 해인사를 향해 뿌렸다고도 전한다. 도인들은 구름도 움직인다고 하던데, 모를 일이다. 아무튼 해인사 화재 진화에 대사가 한 몫을 한 적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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